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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내 마음속 풍경

복거일,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

 

나이가 들어가면, 사람이 바뀐다. 몸이야 눈에 뜨이게 바뀌지만, 마음도 많이 달라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은 점점 쇠퇴하지만, 마음은 어떤 면들에선 나아진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패기가 있고 늙은이들은 지혜가 있다는 얘기는 어느 사회에서나 나오는데, 일리가 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나 상상력은 어쩔 수 없이 줄어들지만, 지혜라 불리는 판단력은 잘 익어가는 과일처럼 상당히 오래 지속된다.

나도 지금은 젊었을 때와 내면 풍경이 크게 다르다. 젊었을 때의 마음속 풍경은 강렬한 원색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빛깔이 훨씬 흐릿하다. 높았던 야심의 산줄기가 낮은 언덕으로 풍화되었고, 기억의 골목마다 깨어진 꿈들의 조각들이 발길에 채인다. 아쉽게도, 득의의 기억들은 세월에 쉽게 바래지는데, 그 많은 부끄러운 기억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가 들수록, 얻지 못한 사랑의 기억은 흐릿해지는데, 받아들이지 못한 사랑의 기억은 오히려 비바람을 견딘 바위 언덕처럼 오롯이 남는다. 젊었던 내 마음이 넉넉지 못했다는 사실이 점점 또렷해지면서, 부끄러움과 회한이 뒤섞여 가슴에 불그스레한 거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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